* 지난 1월 19일치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 [서소문 포럼]의 ‘뒤엎자, 청와대 경호실’에 대한 대통령경호실의 반론입니다.
경호실의 변화를 아는가
“안주하는 자는 혁신하는 자에게 짓밟힌다”는 말을 지난 4년 동안 귀가 닳도록 들었다. 대통령경호실이 창설 50주년을 맞은 2013년 ‘5대 핵심가치’를 제정하여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와대 울타리가 바람막이가 되어 미래 100년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 체계를 정비하여 현장 중심으로 인원을 재편성하고, 선진적인 인사·교육 시스템으로 정비하여 세계 최고의 경호전문기관을 지향하는 프로마니아 조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몸부림을 통해 대통령경호실은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에 속해 있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던 멍에를 털어낼 수 있었다. 호통과 버럭이 통하던 오래된 리더십 대신 소통과 공감의 리더십이 자리잡고, 관행과 경험에 의존하던 업무처리 방식도 체계화된 과학적 기법으로 선진화되었다. 대통령 경호가 보디가드식의 수행만이 아니라 군·경 등 관계기관들이 참여하는 통합작전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면서 더욱 세련되고 단단한 경호가 실현되기도 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서 경호작전이 실패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 경호상의 이유로 대통령 행사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행사를 완벽하게 치르는 게 경호실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경호실의 눈치를 보는 비서실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비서실이 경호실을 제한하는 상황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이 공개를 원하지 않는 ‘보안손님’에 대해 지시받은 부서는 실체를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보안손님의 실체에 관련된 사항을 경호실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연히 보고라인을 통하여 경호실장에게 보고되지도 않는다. 아는 것은 보안손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이다. 누구인지 실체도 모르는 인원의 성별을 ‘내부정보’로 특별하게 여긴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경호실은 정보 생산기관도 아니고 고급정보를 제공받지도 않는다. 경호안전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있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경호실 정보보고’ 운운하며 마치 경호실이 정보기관인양 거론하는 것은 사실을 외면한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일각에서 “경호실이 대통령의 동선을 통제하여 소통을 막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이다. 경호는 계획이 시작이고 끝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수립하느냐가 시작이고 그 계획에 맞게 실행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선진 경호는 계획의 완성도에 달려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동선은 경호와 의전·홍보 등이 협의하여 결정하는 사안이다. 이 결정에 따라 동선이 결정되면 예정되지 않은 인원이 등장하는 것은 경호상의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설령 장관이라 해도 경호실에서 동선을 통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대통령의 소통에 관련된 문제의 원인을 경호실의 통제에서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대통령의 소통은 비서실 관련 수석실에서 방안을 모색하는 게 맞다. 어떤 식으로든 소통의 방안이 결정되면 경호실은 그에 맞는 완벽한 경호계획을 수립하면 된다. 경호실이 소통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은 군사정부 시절에나 거론될 수 있다. 당시에는 경호실에서 대통령 행사 일체를 관할하고 접견자를 선별하는 데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호실은 비서실에서 결정한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오로지 경호조치를 시행할 뿐이다.
대통령경호실의 변화와 혁신은 기관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어야 한다. 경호법 테두리 안에서 세련된 경호기법으로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진경호를 더욱 알차게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직 체계도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검증없는 대안으로 국가안위에 직결되는 조직을 마구잡이로 흔들거나 폭거와 다름없는 ‘뒤엎기’를 조장하는 것은 불순하기 그지없다. 경호실이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소속으로 바뀌는 조처가 있었지만 ‘정책하는 비서실’에 ‘행동하는 경호실’이 동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최근 국정농단 사태로 비화된 최순실씨 등 비선실세 관련 ‘보안손님’ 문제는 경호경비시스템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더 나은 경호실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을 애써 외면하고 ‘교만의 낌새’라거나 ‘비대해진 경호 권력’으로 치부하는 건 트집잡기일 뿐이다. 무엇을 뒤엎어야 할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된 경호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선동적 구호로 재단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사실을 근거로 지금의 경호실을 아프게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일까.